창녕 비화가야 고분서 왜 신라 금동관이 나왔을까? / YTN

창녕 비화가야 고분서 왜 신라 금동관이 나왔을까? / YTN

일본이 4~6세기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겠다며 싹쓸이하듯 털어간 곳, 바로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일대의 가야 고분군입니다. br br 이곳에서 처음으로 금동관을 비롯한 무덤 주인공의 장신구 일체가 발견됐는데요, br br 신라에서 건너온 듯 경주 출토 유물과 빼닮았다고 합니다. br br 이승은 기자가 보도합니다. br br [기자] br 천5백 년 전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 250여 기가 몰려 있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br br 지난해 이 일대에서 처음 63호분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라는 게 확인됐습니다. br br 발굴 결과 금동관과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등 장신구 일체가 발견됐습니다. br br 다만 신발은 없었습니다. br br 귀걸이가 굵은고리인 점, 큰 칼이 없는 점 등으로 봐서 무덤 주인공은 여성, 목관을 이은 꺾쇠 위치로 봤을 때 키는 155cm 정도였습니다. br br 순장 양태에는 가야 문화의 특징이 강합니다. br br 무덤 주인공 발치의 순장 공간에 2명이 묻혔고, 봉토 안에서 석곽 2개와 옹관 1개가 나와 모두 5명이 순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br br 그런데 금동관과 귀걸이 등 귀한 장신구들은 마치 신라에서 만든 듯 경주 출토 유물과 모양이 비슷합니다. br br [양숙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 꾸밈 유물들이 주피장자에 그대로 꾸며진 채로 출토된 것도 창녕 지역 고분에서는 처음이고요. 그 외에 순장 공간의 모습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이 저희로서도 처음 보는 요소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br br 일제는 일본부 존재 증거를 찾겠다며 가야 지역, 특히 창녕 교동·송현동 일대에서 고분을 마구잡이로 발굴했습니다. br br 뚜껑 돌만 열면 유물을 꺼내기 쉬운 탓에 도굴도 많아 유물을 통한 이 일대 시대상 추정이 어려웠습니다. br br 때문에 63호분을 고고학계는 주시하고 있습니다. br br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창녕 지역 세력들을 신라의 손아귀에 넣는 것이에요. (5세기 말~6세기 초는) 그런 단계가 막 시작되는 시점이거든요. 한반도 중남부 지역 쟁패전의 서막을 보여주는….] br br 신라와 가야 경계에서 독특한 문화를 지닌 비화가야 연구는 신라사 연구에도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br br YTN 이승은[selee@ytn.co.kr]입니다.br br ▶ 기사 원문 : ▶ 제보 안내 : , 모바일앱, social@ytn.co.


User: YTN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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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loaded: 2020-10-31

Duration: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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