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은 유물은 상자, 자잘한 건 포대에…거의 도굴 수준”

“굵은 유물은 상자, 자잘한 건 포대에…거의 도굴 수준”

“시간에 쫓겨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마는, 그런 최악의 발굴을 거쳐서 최선의 유적이 나왔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죠.” br   br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지건길(78)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회고다. 당시 28세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소속 학예사보였던 그는 7월 6일 긴급 호출을 받고 충남 공주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휘몰아쳤던 2박 3일을 그는 “얼얼하고 몽환적인 순간들”로 기억한다. 최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났을 때 “한국 고고학사의 기념비적 발굴이지만 또 한편으로 두고두고 욕먹게 한 아픈 실패담”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br    br 설마 했는데, 도굴되지 않은 백제왕릉이 … br   br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지 전 관장의 회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참변’으로 정리된다. 첫째, 현장 공개. 둘째, 성급한 수습. 셋째, 준비 미흡이다. 반세기가 지난 2021년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같이 금기다. 그러나 여러모로 미숙했던 시절, 그들은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최악의 수를 잇달아 뒀다. 당시 발굴단장이던 김원룡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생전에 “여론에 밀려 이틀 만에 무령왕릉 발굴을 끝낸 것은 내 생에 최대의 수치”라고 뼈아픈 반성문을 남겼을 정도다. br   br 시계추를 돌려 1971년 7월 5일로 가자. 공주 송산리 5·6호분 배수로 공사 도중 인부의 삽날에 느닷없이 벽돌이 걸렸다는 소식이 문화재관리국을 거쳐 문화공보부(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로 긴급 보고됐다. 김원룡 단장을 필두로 한 발굴단이 현장을 찾은 때가 7일 오전. 긴가민가하며 파고들어 간 무덤 입구가 완연히 드러나자 바로 옆 6호분과 똑같은 양식의 전축분(벽돌무덤)임이 분명해졌다. 눈치를 챈 한국일보 기자가 공주 현...


Use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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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loaded: 2021-02-24

Duration: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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